언론보도

(현장 출동) 남산 근현대사 역사탐방 현장을 가다...짧은 일생을 영원한 조국에
관리자
Date : 2019.07.10

프리덤칼리지, 대한민국 역사지킴이 회원 여러분들이 2018년 10월 19일 남산 근현대사 역사탐방 행사에 참여였습니다.

원글: 리버티코리아포스트 http://www.lkp.news/news/article.html?no=5312


   

(현장 출동) 남산 근현대사 역사탐방 현장을 가다… 짧은 일생을 영원한 조국에

- 자유민주주의 수호 역사현장 탐방 2번째 시간
- 서울 장충단공원을 시작으로 남산에 숨어 있는 역사 현장 방문
- 자유우국진영의 역사 탐방… 참가자들 자유우국진영의 이런 탐방 널리 알려야 한다는 목소리

 

이번 역사탐방 플랜카드를 탐방 참가자들이 들고 있다.  사진=리버티코리아포스트
▲ 이번 역사탐방 플랜카드를 탐방 참가자들이 들고 있다. 사진=리버티코리아포스트

 


『건국의 과정은 치열했다 공산당과 싸우다 이름도 없이 희생된 수많은 건국 공헌자 그들을 기억해야 되지 않는가? 친북좌파들이 그토록 감추고 싶어하는 건국 과정의 진실은 무엇인가? 라는 테마와 함께 이 눈 시린 가을이 지나면 눈부신 태극기가 시작된 두번째 겨울 시즌이 다가옵니다. 태극기 집회의 2주년에 즈음하여 동계 투쟁에 임하는 각오를 새롭게 다지며 이승만 대통령 동상 참배와 건국반공청년순국선열 참배하는 일정을 포함한 근현대의 격동의 역사 현장 탐방』이라는 모집 문구를 보고 20일 오후1330분 약30명의 사람들이 동대입구역 6번 출구 앞에 모였다.

 

같은 장소에서 이번이 2번째 하는 탐방이며, 이번 탐방은 대한민국역사지킴이, 프리덤칼리지장학회(FCF), 역사두길포럼의 주관 및 협력으로 이루어졌다.


이번 역사탐방 해설자인 김상기 프리덤장학회 후원 회장 & 역사두길포럼 자문위원의 출발 전 인사말과 전달 사항을 이야기 하고 있다   사진=리버티코리아포스트
▲ 이번 역사탐방 해설자인 김상기 프리덤장학회 후원 회장 & 역사두길포럼 자문위원의 출발 전 인사말과 전달 사항을 이야기 하고 있다 사진=리버티코리아포스트

 

 

가이드겸 역사 탐방 해설자는 김상기 프리덤장학회 후원회장겸 역사두길포럼 자문위원(이하 김상기 회장)이 맡았다.

 

멋진 음색으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안내한 김상기 회장은 역사 탐방 내내 참가자들에게 칭찬과 큰 박수를 받았다.

 

출발점은 동대입구역 6번 출구에서 멀지 않는 장충단비(奬忠壇碑)이다.


이번 첫번째 유적물(遺跡物)인 장충단비(奬忠壇碑)와 장충단비 안내판.   사진=리버티코리아포스트
▲ 이번 첫번째 유적물(遺跡物)인 장충단비(奬忠壇碑)와 장충단비 안내판. 사진=리버티코리아포스트

 

 

장충단비(서울시 유형문화재1)는 을미사변(1895108)으로 경복궁에서 시해된 명성황후와 임오군란으로 순국한 충신 열사들을 제사 지내기 위해서 고종이 19009월 건립을 하였는데 항일 감정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비석(碑石)이기도 하다며 김상기 회장의 설명이 시작이다.

 

청(淸)과의 밀착으로 일본의 조선 침략에 걸림돌이 되는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때 궁궐에 난입하는 일본 낭인들과 맞서다 순사한 시위연대장 홍계훈, 궁내부대신 이경직 등의 충신들을 기리기 위해 제단을 만들어 장충단이라 했다. 이곳은 오늘날의 국립현충원과도 같은 곳이다. 그 후 일제가 이곳을 훼손하여 조선 왕조를 지우고 우리의 민족정신까지도 말살을 시도했던 일본의 식민지침략기지로 변해갔다.

 

이곳은 원래 조선 영조(英祖)때 도성의 남쪽을 수비하던 군영(軍營)인 남소영(南小營)이 있던 곳인데 고종37(1900년 대한제국 광무4) 원수부에서 조칙을 받들어 나라를 위해 *죽은 사람들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 (* 죽은 사람들이란 명성황후시해사건 때 수비대 훈련연대장 홍계훈과 궁궐을 지키다 산화한 장졸들과 궁인들이며, 장례원(掌禮院)으로 하여금 매년 봄, 가을 제사를 지냈다.)


 

명성황후 인산 장면  사진=서울역사박물관 캡쳐
▲ 명성황후 인산 장면 사진=서울역사박물관 캡쳐


처음에는 시위연대장 홍계훈을 비롯한 영관 염도희, 이경호를 주신으로 제향(祭享 나라에서 올리는 제사), 장병들은 배향(配享 신주를 모시는 것)으로 제사를 지냈으나, 군인만 할 것이냐는 상소로 다음해부터 궁내부 대신 이경직을 비롯해서 임오군란, 갑신정변때 순사한 문신들도 포함됐다


 

박문사   사진=MBC다큐 화면 캡쳐
▲ 박문사 사진=MBC다큐 화면 캡쳐

 

 

일본의 압박으로 1908년부터 제사는 중단되었으며 1909년 이토 히로부미가 살해된 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사당이 만들어지며, 1932년에는 현재의 신라호텔 자리에 이등박문 23주기(1932.10.26)에 맞춰 박문사라는 사찰을 건립하였다 사찰언덕을 춘무산(이토 히로부미 호)이라고 불렀으며, 일본은 박문사를 만들기 위해 장충단의 4만 평의 숲을 훼손하였고, 광화문의 석재, 남별궁의 석고각, 경복궁 선원전을 헐어다 본전과 서원을 지었다. 그리고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을 뜯어다 옮겨 박문사의 정문으로 만들었으며 경춘문이라 했다. 낙성식때는 히로히토 일본 왕()이 은으로 만든 대형 향로와 향화료(香華料)를 하사했고, 소위 일본 황족이라는 사람들은 꽃병을 하사했다고 한다.

 

1932 1026일 완공(23번째 기일)했고 설립목적은 조선초대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훈업을 영구히 후세에 전하고 일본 불교 진흥 및 일본인과 조선인의 굳은 정신적 결합을 도모하기 위해서라 했는데 이는 우리 민족혼을 말살시키는 문화, 정신 침탈이며 이와 유사한 사례는 창경궁에 동물원을 만들어 창경원이라 비하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일제가 창경궁을 동물원을 만들어서 창경원으로 만들어서 궁을 훼손했다. 창경원에 있던 낙타 모습.  사진=유튜브 캡쳐
▲ 일제가 창경궁을 동물원을 만들어서 창경원으로 만들어서 궁을 훼손했다. 창경원에 있던 낙타 모습. 사진=유튜브 캡쳐

 

 

해방 후 안중근(安重根) 의사(義士) 위패가 봉 안되었었고, 6.25전쟁이후국군전몰장병합동위령소로도 이용이 되었으며, 경희궁흥화문 1988년 경희궁 복원 때 다시 옮겨갔다. 해방 후 미군정은 종교시설에 대한 국제법적인 원칙에 따라 불교시설은 불교계에 이관으로 해석해서 미군정(美軍政)이 지원한남조선과도입법위원에서 논의 중 김법린이 주장한공공시설에 설립된 박문사는 새로운 국가 출범에 즈음 다시 관유지로 귀속안이 채택이 되어서 불교계로 넘어 가지 않았고, 반면 조계사 등은 불교에 이관되었다 한다.

 

1910 8월 일제의 의해 장충단은 폐사(廢寺)가 되었고 1920년대 후반 일제가 이곳에 벚꽃식재등을 하며 장충단공원 바꾸고 창경원과 같이 위락시설로 바꾸었다.


장충단이 일제에 의하여 공원이 되었다.  사진=서울역사박물관 캡쳐
▲ 장충단이 일제에 의하여 공원이 되었다. 사진=서울역사박물관 캡쳐

 

 

뿐만 아니라, 일제의 군국주의 사상을 고취하기 위하여 서쪽 산 밑에는 상해사변 당시 사망한 3명의 일본인 결사대를육탄삼용사라는 이름으로 동상을 세워서 이 곳에 얽힌 우리의 역사적 사실을 완전히 말살하려 하였다. 우리의 국립묘지를 일본인 용사의 성지로 만들었던 것이다.


일제가 장충단을 공원화 하면서 육탄삼총사 동상을 세워 놓았는데 당시 그 동상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일본인들.   사진=유튜브 캡쳐
▲ 일제가 장충단을 공원화 하면서 육탄삼총사 동상을 세워 놓았는데 당시 그 동상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일본인들. 사진=유튜브 캡쳐

 

 

1945815일 광복 후육탄삼용사동상과 박문사는 철거가 되었고 사당과 부속건물은 6.25때 소실되었으며 1959년 청계천이 복개되자 수표교를 철거하여 이곳으로 옮겼으며, 1969년에는 영빈관 내에 있던 장충단비는 현재 위치인 수표교 옆으로 옮겨졌다.

 

장충단비는 장충단을 지을 때 함께 세워졌는데 장충단(奬忠壇) 세 글자는 순종(재위 1907~1910)이 황태자로 있을 때 쓴 글씨이고 뒷면에는 당시 육군부장(陸軍副將)이던 민영환(閔泳煥, 1861~1905)이 쓴 143자의 찬문(撰文)을 지었다.

 

찬문은 이러하다.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대황제 폐하께서는 자질이 상성(上聖)처럼 빼어나고 운수는 중흥을 만나시어 태산의 반석과 같은 왕업을 세우고 위험의 조짐을 경계하셨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가끔 주춤하기도 하셨는데 마침내 갑오. 을미사변이 일어나 무신으로서 난국에 뛰어들어 죽음으로 몸바친 사람이 많았다. ! 그 의열(毅烈)은 서리와 눈발보다 늠름하고 명절(名節)은 해와 별처럼 빛나니, 길이 제향(祭享)을 누리고 기록으로 남겨야 마땅하다. 그래서 황제께서 특별히 충성을 기리는 뜻을 표하고 이에 슬퍼하는 조서(詔書)를 내려 제단을 쌓고 비를 세워 표창하며, 또 계속 봄가을로 제사드릴 것을 정하여 높이 보답하는 뜻을 보이고 풍속으로 삼으시니, 이는 참으로 백세(百世)에 보기 드문 가르침이다. 사기(士氣)를 북돋우고 군심(軍心)을 분발 시킴이 진시로 여기에 있으니 아! 성대하다. ! 성대하다』


 

장충단비에서 옆에는 수표교(水標橋)가 있다. 사진=리버티코리아포스트
▲ 장충단비에서 옆에는 수표교(水標橋)가 있다. 사진=리버티코리아포스트

 

 

장충단비를 바라보는 방향에서 오른쪽에는 수표교(水標橋, 서울시 유형문화재 18)가 있다.


수표교는 청계천 다리이다. 조선세종(世宗) 2년에 처음 놓였으며, 만들어질 당시 그 곳에 마전(馬廛)이 있어서 마전교(馬廛橋)라 불리었다. 세종 23(1441) 다리 앞에 청계천에 흐르는 수위를 측정하기 위해서 수표(水標, 보물 제838)를 세웠다. 다리 아래에 장통교 동쪽에 있고, 다리 서쪽 중앙에 석표를 세우고, 척촌(尺寸)을 새겨서 무릇 빗물의 깊고 얇은 것을 알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후 영조(英祖 36 1760)에 다리를 수리하면서 돌기둥에 경(), (), (), ()이라는 글씨를 새겨 물높이를 4단계로 측정하였다. 이때부터 수중주석표(水中柱石標)라는 말이 생겨나수표교라 부르게 되었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수표동에 있었으나 1958년 청계천 복개공사로 장충단공원으로 옮겨졌다. 복원된 청계천의 폭과 수표교의 길이가 맞지 않아 옮겨지지는 못했고 대신 그 자리에는 임시 다리가 놓여 있다. 수표교는 길이 27m, 너비 7m, 높이 4m이다. 숙종과 장희빈이 만난 다리였다는 풍설이 있다고 김상기 회장은 설명이다.

 

장충단비를 시작으로 장충단 공원 일대에는 수표교, 관성묘, 3.1운동기념비, 유관순, 피리장서비, 이준열사, 김용환 선생, 충정공 민영환 등이 있고 이곳과 남산 일대에 있는 기념비 등의 동상은 박정희대통령 당시 세워졌다고 한다.


1971년 제7대 대통령선거 후보 연설을 장충단에서 하고 있는 당시 김대중 후보 모습   사진=유튜브 캡쳐
▲ 1971년 제7대 대통령선거 후보 연설을 장충단에서 하고 있는 당시 김대중 후보 모습 사진=유튜브 캡쳐

 

 

장충단비와 수표교를 보고 난 뒤, 발걸음을 옮기면서 1971 418일 제7대 대통령선거전 유세 이른바장충단 유세 대결 100만명 시민들이 모였는데 당시 김대중의 공략은 향토예비군 폐지, 지자체 도입, 부유세신설 등이었다는 김상기 회장의 설명이다.


일본인들을 위한 중학교(경성중학교)를 짓기 위해 헐리는 경희궁 1907년경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 일본인들을 위한 중학교(경성중학교)를 짓기 위해 헐리는 경희궁 1907년경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경희궁은 사적 271호로 지정된 경희궁은 조선후기 이궁(離宮)이었다. 1617(광해군9)부터 짓기 시작해서 1623(광해군 15)에 완성되었다. 경희궁이 들어서기 전 이곳에는 인조의 아버지인 정원군의 집이 있었는데 이곳에 왕의 기운이 서려 있다는 이야기가 있어 그 터를 몰수하고 왕궁을 지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경희궁의 처음 이름은 경덕궁이었는데 원종의 시호인 경덕과 같은 발음이라 하여 1760(영조 36) 경희궁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1910년 일본인을 위한 학교인 경성중학교가 들어서면서 숭전전 등 경희궁에 남아있던 중요한 전각들이 대부분 헐려 나갔고 그 면적도 절반 정도로 축소되어서 이로 인하여 안타깝게도 경희궁은 궁궐의 모습을 일어버렸다가 서울시는 1987년부터 경희궁 터에 대한 발굴을 거쳐 숭정전 등 정전지역을 복원하여 2002년부터 시민들에게 공개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영빈관은 1959년 이승만대통령께서 발의해서 국빈(國賓)을 모시기 위해서 공사를 했는데 4.19 5.16으로 잠시 중단되었다가 1967년 완공을 하였다. 그러나 경영난이 심해져서 민간기업에 매각하기로 했는데 국영 워커힐 호텔은 선경(현재 SK), 영빈관은 삼성으로 매각하였다.

 

옆에 보이는 신라호텔은 1973 7월 영빈관 인수해서 1979 38일 개관을 했는데 여기서 좌파단체는 신라호텔이 일본의 오쿠라호텔과 15만 달러, 총매출액의 1%, 영업 이익의 4.5%선에서 위탁경영계약을 체결하여 호텔사업을 운영하였다며 즉 친일파적 건물이라하며 장충단의 원상회복을 위하여 철거를 주장하는 단체도 있다는 설명에 탐방 참가분 중에서신라호텔을 백제호텔로 바꾸면 그런 소리 안 나온다며 우스개 소리도 나왔다.

 

김상기 회장의 말이다. “당시 우리나라는 너무나도 빈약했고 경험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벤치마킹을 해서 배우지 않았다면 지금의 신라호텔은 없었다. 사실 이번이 2번째 역사탐방인데 첫 1회를 시작할 때 전문 가이드를 섭외를 해 보려고 했었는데, 다른 것은 문제가 없었는데 근현대사 부분에서는 좌파들이 주장하는 역사관을 가지고 있는 가이드들이 너무나 많아서 어쩔 수 없이 내가 나서게 되었다. 실제로 가장 무서운 역사 공부는 이렇게 현장에 나와서 듣고 체험하는 것인데 그것은 교실에서 혹은 실내에서 듣는 것과는 상당히 차이가 있는 말 그대로백문이 불여일견(白文不如一見)’이라는 말이 있듯이 이렇게 나와서 보고 느끼고 그야말로 직접 체험하는 것은 오랫동안 기억이 되기 때문에 좌파적 역사관으로 가이드 하는 것은 역사왜곡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심히 우려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사실, 나 역시 보는 시각을 삐딱하게 해서 설명을 할 수 있는데 역사 해석은 그렇게 하면 안된다. 중요한 것은 역사는 팩트로 봐야 하고 지금의 잣대로 판단하는 것은 금기(禁忌)해야 한다. 그래서 그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상황을 이해하는데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파리서장비와 안내판   사진=리버티코리아포스트
▲ 파리서장비와 안내판 사진=리버티코리아포스트

 

 

자리를 옮겨 발걸음을 멈춘 곳은 파리장서비 앞이었다.

 

한국유림독립운동 파리장서비는 1919 3.1 운동이 일어나자 한국 유림은 파리에서 열린 세계평화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서한을 제출해 독립의지를 알리고, 일제의 한국 주권 찬탈 과정과 식민지배의 불법성, 한국독립의 정당성을 주장을 위해 당시 영남의 곽종석 선생, 충청의 김복한 선생, 호남의 고석진 선생 등 전국 유림대표 137(나중에 발각돼서 모두 옥고를 치르고 굉장히 고초를 당함)이 연서한 이 장서(파리장서, 파리에 보낸 긴 글이라는 뜻)를 김창숙(훗날 성균관대학교 설립 초대총장)으로 하여금 상해로 가져가도록 하였고 이를 다시 김규식(훗날 김구와 함께 북으로 가서 김일성과 남북통일협상차 북한 평양에 갔다가 실패하자 정계은퇴)을 통하여 파리 강화회의 제출되었으며 또한 각국 대표와 외국 공간과 국내 각지의 향교에 배포되었다.

 

이 장서(파리장서)를 살펴보면, 본문 2,674字 한문체로 기록작성 곽종석 선생이 하였고 한문 3,000, 영문 2,000, 불어(프랑스어) 1,000부 번역 인쇄를 했고 1919년 고종 인산 침례차 한양으로 오게 되는데 3.1운동을 보고 이 독립청원서는 국내 유림을 비롯 중국. 미국, 일본, 유럽 동시 배포를 하여 국제 여론을 환기시켰으며 중대한 독립운동 역사 중 하나이다.

 

이 파리장서에 서명은 보복을 예견하면서도 학자적 양심과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 걸고 서명한 것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대통령 희사금과 국민의 성금 등으로 1972 10월 장충단공원에 비를 건립하였으며 거창, 밀양, 달서, 홍성, 합천, 정읍, 고창, 봉하, 김해 등지에 건립이 되어 있다.


이준 동상과 안내판  사진=리버티코리아포스트
▲ 이준 동상과 안내판 사진=리버티코리아포스트

 

 

자리를 옮겨 간 곳은 바로 이준(李儁) 열사의 동상 앞이다.

 

이준 열사는1859년 함경남도 북청 출생이며, 1895(36세때) 대한민국 최초의 한성법관 양성소(漢城法官養成所) 1회 졸업생이며 이듬해 한성재판소 검사보(漢城裁判所 檢事補), 상동교회 청년회장을 맡았다.

 

검사5년차에 법무대신 이하영 탄핵하였다. 올바르지 못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용납하지 않아서 박해 받기도 할 정도로 강직한 근무를 했으며, 1895년 독립협회 가담, 일본망명후 와세다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1904년 대한 보안회 도총무(大韓 保安會 都總務)로서 일본의 황무지 탈취음모 분쇄 대한적십자 회장 공진회 회장으로서 일본에 대항하다가 미움을 사서 황주철도에 6개월간 유배생활을 하는데 이때 성경을 탐독했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될 때 만국청년회 회장으로 국제친선운동을 전개하면서 국민교육회 회장으로 교육사업에 매진해서 오성학교(五星學校)를 설립하니 이는 오늘의 광신상업(光新商業) 및 건국대학교의 전신이다.

 

1907년 국채보상협회(國債補償協會) 회장을 맡았다. 그리고 이상설, 이위종 선생과 함께 고종황제의 신임장을 휴대하고 제2차 만국평화회의(萬國平和會議)에서 일본의 침략을 규탄, 호소하러 갔으나, 일제의 방해로 회의 참석 못함과 열강의 냉담한 방에 의분(義憤)을 참지 못하고 순국하였다. 이 동상 역시 박정희대통령때 건립이 되었다.


유관순상   사진=리버티코리아포스트
▲ 유관순상 사진=리버티코리아포스트

 

 

자리를 옮겨 유관순 동상 앞으로 갔다.

 

유관순 열사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유명하고 잘 알려져 있는 분이라서 설명은 생략하고 묵념으로 고인의 정신을 기리고 단체기념사진 촬영 후 다음 장소로 이동을 했다.


유관순 상 앞에서 이번 탐방 참가자들이 모여서 대한민국 화이팅!을 외치고 있는 모습    사진=리버티코리아포스트
▲ 유관순 상 앞에서 이번 탐방 참가자들이 모여서 대한민국 화이팅!을 외치고 있는 모습 사진=리버티코리아포스트

 

 

다음 장소로 이동한 곳은 한국자유총연맹(KFF, Korea Freedom Federation) 이었다.

 

그곳에는 대한민국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대통령 동상이 있었다. 탐방자들은 그곳에 헌화 분향을 하고 기념 사진을 찍었다.


조국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 대통령 동상 앞에 헌화한 모습  사진=리버티코리아포스트
▲ 조국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 대통령 동상 앞에 헌화한 모습 사진=리버티코리아포스트

 

 

김상기 회장의 대한민국 1대 대통령 1948~1952, 2대 대통령 1952~1956, 3대 대통령 1956~1960.4을 역임한 이승만 대통령의 생애를 설명이 이어졌다.

 

이승만(1875.3.26~1965.7.19)은 황해도 평산에서 태어났다.

 

1895 4월 배제학당 입학을 하고 협성회 회보 주필을 맡았고, 만민공동회 참여와 독립협회 일원으로 활동을 했다.

 

1899년 고종황제폐위 음모사건에 연루가 되어 1904년까지 57개월간 한성감옥에 투옥이 되었고 끝임없이 외세침략에 항거, 국민계몽몽운동을 펼쳤다.

 

1904 11월 한국의 독립청원을 위해서 미국행을 결심하게 되는데 1905 8월 루즈벨트 대통령 면담을 했으나, 러일전쟁계기로 일본을 지지하는 입장이라 성과를 못 거두었다.

 

미국에서 1910년 재미동포로 조직된 국민회 가입, 1910 8월 귀국해서 YMCA 청년부 간사, 감리교 선교 활동을 하다가 1912 ‘105인 사건으로 4월 미국으로 돌아간다.

 

그 후, 1919 321일 노령임시정부 외무총장, 1919 410일 국무총리, 1919 42일 한성임시정부 집정관 총재를 맡게 되는데 통합된 상해임시정부 의정원은 1919 96일 이승만을 임시 대통령으로 추대 하였다

 

1920 12월부터 6개월간 상해에서 임시정부 대통령직을 수행하지만 자유를 신봉하는 그로서는 공산주의자들과의 이견과 압박에 1921 5월 다시 미국으로 간다.

 

1924 11월 호놀룰루에서 대한인 동지회에서 종신 총재를 맡고 1925 3월 임시정부에서 탄핵을 당하는데 그 사유는 국제연맹위임 통치 이른바위임통치사건인데 이승만을 비롯한 외교독립론(외교를 통한 독립을 이루자는 사람들)을 주장하는 측이 1919년 미국 우드로 윌슨 대통령에게 위임 통치를 해 달라는 청원서를 보낸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임시정부 내 이승만을 비롯한외교독립론자무장투쟁론자사이의 관계는 악화됐다.

 

이 부분을 좀 더 설명을 하면, 이승만은 미국에 대한위임통치를 사과하라는 임시정부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신채호는 1919 4월 임시의정원회의에서이승만은 이완용보다 더한 매국역적이다.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아직 나라를 찾기도 전에 팔아먹었다라고 거세게 비판했다.

 

게다가 대통령이 됐음에도 1년째 상해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임정의 인사들이 이승만대통령의 태도에 크게 반발하자, 1920 12월 처음으로 배를 타고 상해 임정에 왔다. 하지만 사회주의, 공산주의자들과의 갈등 때문에 1921 5월 이승만은 미국 하와이로 떠난다.

 

1925 3월 탄핵을 받고 대통령에서 면직되지만, 조소항의 편지에서 보듯 이승만의 임정 내 기반을 잃은 것은 아니었다. 훗날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이 되는 임정 국무위원 이시영(李始榮)도 편지에서 탄핵을정변(政變)’이라 표현하고 이승만의 상해 복귀를 촉구했다.

 

상해의 반() 이승만 세력이 임정의 개조를 논의하기 위해국민대표회의를 열던 1923 1월 이상재, 최남선, 오세창, 한용운, 박영효 등 국내 인사 6명은경고해외각단체서(敬告海外各團體書)’를 마련해 해외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배포했다. 이 문건은지방별로 분열하는 것을 배제하고, 이미 성립된 정부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승만이 이해 3월 이상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문서에 대하감사하고 부끄러운 마음을 금치 못해 눈물마저 흘렀습니다고 했다.

 

1928 1120일 임정 국무령이었던 김구(金九)가 이승만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나 석오(石吾. 이동녕)엄동(嚴冬)에 겹옷도 입지 못하고 떨면서 이 편지를 쓰는 충정도 좀 알아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임시)정부 집세로 소송을 당하게 되었으니 수령(首領)을 지낸 선생님인들 마음에 어떻겠습니까?

 

한 살 적은 김구는 편지에서 스스로를동생이라 낮추고 이승만을선생님으로 높이며 임정의 어려운 사정을 호소했다. 이승만이 김구를 대하는 태도는 조금 달랐다. 그는 편지에서 김구를인형(仁兄)이라 불렀는데 이는 친구 정도의 사이에서 서로를 높여 부르는 말이었다. 그러나 이 무렵 이승만과 김구 두 사람의 근본적인 노선 차이도 드러난다. 김구는 1936 6월 호놀룰루의 동지회 중앙부장 앞으로 보낸 편지에서 이승만의 비폭력주의 노선을 비판하고 무력투쟁에 직결된 사업에 치중할 것을 촉구했다. 이에 대해 이승만은 두 달 뒤에 김구에게 보낸 편지에서미국은 민중이 전쟁을 결정하는데, 신문에 날마다 일본인이 만행을 알리면 정부와 국회에 영향을 미쳐 정책을 바꿀 것임을 아직도 모르는가라며 자신이 주력하던 외교, 선전전의 정당성을 역설했다.

 

해방 후, 미군정이 조직한남조선대한국민대표 민주의원의장으로 선출되었으나, 미군정이 소련군과 타협을 함으로서 의장직 사퇴한다.

 

1946 63일 정읍 발언에서남쪽만의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조직 필요하다고 했다. 그후, 1948 510일 동대문갑 단독출마해서 국회의원이 되고 1948 531일 국회의원 소집에서 국회의장으로 선출된다. 1948 720일 국회선거를 통해 대통령 선출되어서 1948 724일 대통령 취임을 한다. 그리고 1948 12월 유엔은 대한민국을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승인했다. 1949년 반미특위 친일본인사 처벌 반대 입장과 농지 개혁실시, 북진통일론, 공군창설지시, 대통령직선제 개헌 1952 8 2대 대통령선거 74.6% 당선이 되고, 정전 협정 반대는 하지 않지만 참여하지 않는 조건으로 1953 101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고 한국군 작전통제권을 유엔군 사령관 관할로 두지만 미국의 군사 원조 약속한미합의 의사록체결한다.

 

1959년 원자력연구소 설치, 1960 3.15 부정선거(85) 그리고 4.19 그 후 426일 하야 후 529일 하와이 망명 1965719일 하와이 호놀룰루 요양원에서 사망.

 

이승만 대통령의 업적 중 미국과 국제정치 변동사항을 통찰했고 대한민국 건국했으며, 자유민주진영을 구축하고 보편적 가치관 형성을 했으며 무엇보다도 이 나라가 경제 발전할 수 있도록 즉 국방, 외교를 튼튼하게 한 한미동맹이었다고 김상기 회장의 설명이다.


이승만 대통령 앞에 태극기를 펼치고 있는 역사탐방 참가자들   사진=리버티코리아포스트
▲ 이승만 대통령 앞에 태극기를 펼치고 있는 역사탐방 참가자들 사진=리버티코리아포스트

 

 

김상기 회장은 이 대목에서 대한민국 건국 연혁을 한번 살펴 보자며 그 출발점으로 태평양전쟁 부터 설명이다.

 

1941~1945 태평양전쟁→1941.12.7 태평양전쟁→1943.11.27 카이로선언(한국독립 최초결의) →1945.5 독일 항복→1945.7.26 포츠담선언(독립재확인, 일본 무조건 항복 요구) →1945.8.6 히로시마, 8.9 나카사키 원자폭탄 투하→1945.8.15 일본 항복→1945.10 이승만 귀국→1945.11 임시정부요인들 귀국→1945.12.28 모스크바 3상회의(한국독립절차 논의,신탁통치 5년 미.소공동위원회 결의)→1946.3.14 1차 미.소공동위원회→1947.9 2차 미.소 공동위원회 결렬→47,11.14 미국단독 유엔총회 상정 UN감시하 남북한자유총선거에 의한 통일정부 수립 결의→ 47년 제주4.3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