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 열차의 낭만 그리고 그윽한 만남 / 조형곤>
새 차다. 사물함이 진열장이 된다.
요구르트 장과 도구 장과 책장이다.
마그다가치와 스코보로디노는
잠결에 무심결에 지나고
에로페이 파블로비치와 아마자르와
모고차가 잊을 만하면 두 시간마다 나타나
콧구멍에 된바람을 맛보여준다.
에로페이 파블로비치 역.
용이 아닌 개머리 배 두 척이 이끄는 도시.
뛰노는 아이들의 자지러짐이 상큼하다.
아마자르 역의 한가로움,
모고차 역의 눈부시게 파아란 하늘,
어느 하나 지나칠 수 없는
시베리아의 보물이다.
드디어 '체르니세예프스크 자바이칼시티' 역.
이제부터 밤의 향연이 달아오른다.
꼬냑과 보드카를 들고온
핀란드 벽안의 두 젊은이.
순례단 두 낭자를 비롯해 남녀노소 없이
품격 높은 한-핀란드 리셉션이 펼쳐진다.
정운찬과 달리 서울 곳곳을 누비며
한국 공부 이렇게 한다 보여준 밀레.
핀란드의 어제와 오늘을 얘기하며
그리 되지 말라 한국을 걱정하는 로노.
밤이 짧다.
늦게 나타난 유주선 단골은 판을 휩쓸고
이목원 단골은 복도에 서서
이슥하도록 로노와 토론으로 밤을 달군다.
간밤에 카림스카야 그리고 치타에서
잔뜩 내렸는지 빈 방이 보인다.
킬로크의 아침을 따라 유주선 단골이
우리 성지순례의 금기를 깨뜨렸다.
어제는 햇반 하나더니
오늘은 자그마치 여덟을 갖고가 데워왔다.
간만에 밥다운 밥을 다들 들더니
모두들 꾀죄죄한 낯빛에도 눈빛이 밝다.
그 기운으로 다시 사상 최초의 장을 연다.
가운데 방에 모여 시베리아 열차
주일예배를 올린다. 거룩하다.
십자가의 주님이 거룩하고
뒤따라 나라와 열방을 구하려는
이들이 거룩하다. 기찻간이라 나지막하게
울려퍼지는 고백과 기도와 찬송이건만
광기에 들뜬 광장보다 외려 웅혼하다.
다시 한 주를 채비하는 이들 앞에
시베리아 자바이칼의 속살이 드러난다.
< 초원의 길> 가운데 그 북단의 길,
스텝과 타이가의 틈새로 열차가 지나니
자작나무 숲과 물길 그리고 마을이
번갈아가며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