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위대한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 대통령을 기념하자 (권영세)
관리자
Date : 2019.08.10

 

 

아프리카에서 커다란 농장을 상속받은 부유한 농부가 있었다. 어느 날 상인이 방문해서 다이아몬드 광산을 발견해서 엄청난 부자가 된 사
 
람의 이야기를 해 주었다. 농부는 다이아몬드 광산을 갖지 못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다가 농장을 싸게 팔고 다이아몬드를 찾아 떠났다.
 
여러 해를 다이아몬드를 찾아 헤매는 동안 돈이 떨어지고 비참한 신세가 되어 바다에 몸을 던져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한편 새주인은 커
 
다란 농장을 갖고 싶은 자신의 소망을 이루었다는 기쁜 마음으로 열심히 일하다가 농장을 가로 지르는 개천에서 아주 밝은 광채를 내는 이
 
상한 돌을 발견했다. 그 신기한 돌을 집으로 가지고 와서 그것에 대해 잊고 지냈다. 그 상인이 농장에 다시 방문해서 이상한 돌을 보고는
 
흥분하면서 그것은 대단히 비싸고 귀한 다이아몬드라고 말했다. 농부가 상인과 함께 가보니 농장 전체가 값 비싼 다이아몬드가 가득한 광
 
산이었다. 우리나라는 해마다 1000억 달러의 국제수지 흑자를 기록하고 있는 세계11위의 경제강국이다. 미국도 부러워하는 인터넷 강국이
 
며 이미 유엔 사무총장까지 배출한 나라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에 대한 자부심도 감사도 없고 ‘헬조선’이라고 저주하는 소리만
 
들릴 뿐이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세력들이 끊임없이 건국세력에게 겹겹이 누명을 씌워 온 결과이다. 왜곡
 
과 조작으로 파괴된 현대사의 실상을 발굴, 복원, 재생하여 국가 역사를 재건하지 못한다면 다이아몬드가 가득한 자신의 농장을 헐 값에
 
버리고 떠난 어리석은 농부처럼 대한민국 전체가 역사의 폭력으로 희생될 것이다. 우리는 자기 아버지를 잊고도 태연한 가족처럼 위대한
 
건국대통령을 스스로 버린 나라가 되었다. 이제 위대한 건국의 아버지를 되찾아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확립해야 한다.
     
 
 
우남 이승만 대통령은 조선왕국이 해양으로부터 새로운 문명의 물결이 밀려 들어오기 시작하던 1875년에 태어났다. 계속 과거에 응시했지
 
만 과거제도가 부패해서 낙방했고 그 과거마저도 1894년 갑오경장으로 폐지되었기 때문에 19세에 삶의 목표를 잃게 되었다. 그때 친구였
 
던 신긍우의 권유로 아펜젤러가 세운 배재학당에 입학했다. 영어에 특출한 재능을 보였던 그는 6개월만에 신입생들에게 초보영어를 가르
 
치는 조교가 되었다. 영어는 그의 생계수단이 되기도 했는데 새로 온 미국인 선교사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면서 용돈을 벌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정치적 자유’의 개념을 배웠다.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평등하고 동등한 권리와 기회를 갖고, 정부를
 
선택할 권리를 갖는다는 것이었는데 군주제와 신분제의 굴레 속에 살아 온 이승만에게는 너무나 새롭고 놀라운 것이었다. 서재필 박사가
 
귀국하여 배재학당의 강사로 나오면서 ‘협성회’를 조직하고, 토론을 거쳐서 다수결로 합의를 이끌어 내는 민주주의적 방식을 가르쳤는데
 
이승만은 그 모임의 기관지인 <협성회보>의 편집장이었다. 이 조직은 더 자유롭게 정부를 비판하기 위해서 독립협회로 모이게 되었다. 정
 
부는 독립협회가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제 도입 음모를 꾸민다고 간부들을 체포했는데 이승만도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감옥안
 
에서 성경을 읽으며 국민계몽을 위해서 독립정신이라는 책을 썼는데 자유, 평등, 민권 등 근대적 정치이념이 포함된 민주국가의 철학이 완
 
성되어 있었다. 이승만은 1904년에 석방되어 선교사의 권유에 따라 미국에 유학을 가게 되었다. 미국에서 YMCA와 교회를 돌며 강연하면
 
서 생활비를 벌면서 공부해서 국제법과 외교사를 전공해서  1910년 6월에 프린스턴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학위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 YMCA에서 기독교 평등 사상과 미국의 자유주의 사상을 가르쳤는데 일본 헌병의 감시 대상이 되었다. 일본은 기독교인들의 민족주
 
의 운동을 파괴하기 위해 105인을 체포했는데 다행히 미국 선교사의 도움으로 체포를 면하고 1912년 3월에 다시 미국으로 망명하게 되었
 
다. 이승만은 하와이에서 한인기독학원과 한인기독교회를 세워서 독립운동을 해 나갔다. 안창호, 서재필 등의 주요 독립운동가들은 편의상
 
미국의 시민권을 받았지만 이승만은 무국적자 망명객 신분으로 살았다. 1919년 3.1 운동 직후, 임시정부 수반으로 임명되면서 외교활동을
 
통하여 외로운 독립운동을 시작하였다. 이승만의 외교독립운동은 한국의 독립을 허용할 것이라는 카이로 선언을 이끌어 내는 기초가 되었다.
     
 
 
해방 후 이승만 대통령은 동유럽과 달리 공산주의를 쓰나미를 막아내어 소련의 위성국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아낸 유일무이한 지도자이다.
 
해방공간의 대혼란을 수습하고 대한민국을 수립한지 2년 만에 6.25 전쟁을 맞아 이를 극복하면서 신생공화국의 기초를 닦는데 주력한 결
 
과 정치, 외교, 군사, 교육, 사회, 문화 등 여러 분야에서 획기적인 업적을 성취하였다. 정치분야에서는 자유민주주의 원칙에 입각해 대한민
 
국을 건국하고 대통령 중심제 정부를 확립하였으며 언론의 자유를 비교적 폭넓게 허용하고, 선거와 의회제도를 존중하며, 양당제도의 발달
 
을 용인하고, 지방자치제를 도입하는 등 형식상 민주주의를 유지하여 한국민의 민주적 자치능력 개발에 기여하였다. 외교분야에서는 대한
 
민국의 수립을 미국 등 30여개 국가로부터 승인을 획득함으로써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획득하였고, 1953년 10월에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
 
결하여 미국의 군사적 보호우산 아래 전쟁이 일어나지 않고 여러분야에서 발전을 기할 수 있게 되었다. 군사분야에서는 6.25 전쟁 발발 후
 
유엔군과 긴밀한 공조관계를 유지하고 남한국민의 대다수의 충성을 확보하여 북한 침략군과 중공군을 휴전선 이북으로 격퇴시켰고 미국
 
에 끈질기게 군사원조를 요청한 결과 10만명에 불과했던 한국군의 규모를 1954년 70만 수준으로 늘리는데 성공하였다. 경제분야에서는
 
만성적인 인플레를 극복하고, 전후 경제복구에 성공하였으며, 수입대체산업을 육성하여 공업화의 단초를 열었다. 특히 6.25 전쟁 발발 전
 
에 개시된 ‘농지개혁’을 통하여 지주 토지소유제를 청산하고 경자유전의 원칙에 따른 자작농적 토지소유제를 확립하였다. 교육분야에서는
 
6년제 의무교육제도를 도입하고 성인을 대상으로 문맹퇴치 운동을 전개한 결과 1959년까지 전국 학령아동의 취학률을 95.3%로 높이고,
 
해방 당시 80%에 달하던 문맹률을 22%로 낮추는데 성공했다. 중고등학교와 대학을 대폭 증설하고 해외유학을 장려하여 산업화에 필요한
 
고급인재를 양산했다. 사회분야에서는 농지개혁을 통하여 전통적인 양반제도를 뿌리 뽑고, 남녀 동등한 교육 및 취업 기회를 정책적으로
 
보장함으로써 한국 사회의 평등화에 획기적으로 기여하였다. 문화분야에서는 한글전용 정책을 독려하여 본격적인 ‘한글시대’를 개막하고
 
전통적인 문화의 계승 및 보존을 위한 조치를 강구하여 민족문화창달에 기여하였다. 이와 같이 국가경쟁력 시대인 21세기 지구촌에서 이
 
승만 대통령만큼 경쟁력 있는 브랜드도 없다. ‘싱맨 리’는 전세계에 알려진 전설적 이름이다. 그의 삶은 수백편의 드라마, 웅장한 오페라다.
 
이승만 정신은 한민족의 역사적 재산이며 세계 약소국가의 독립과 건국모델이다.
     
 
 
광복절은 있어도 건국절은 없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일제 36년을 벗어난 환희가 너무 컸던 때문일까? 건국일을 기억하는 사람은 대한민
 
국에서 드물다. 연령층이 내려갈수록 더욱 심각하다. 지금 좌편향된 한국사 교과서는 대한민국은 출발부터 잘못된 나라로 청소년들에게 각
 
인시키고 있다. 부끄러운 나라 대한민국 만들기. 이것이 청소년에게 역사교육을 시키는 목표인 것 같고 이미 8부 능선을 넘었다. 풍전등화
 
의 대한민국을 구하기 위해서도 위대한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 대통령을 바로 알려야 한다. ‘이승만 광장’을 만들어 동상을 세우고, 건국절
 
축제도 만들고, 우남로와 건국기념공원도 조성하여 후세들에겐 교육장으로, 세계인들에겐 문화상품으로 만들어, 국격을 갖춘 선진 한국으
 
로 거듭나길 간절히 바란다.
 
     
권영세
 
[이승만 연구소 총서 참조]